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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기록/생각주머니

땅굴

by brabbit.93 배토끼 202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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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어둠이 있다.

스물여섯보다 조금 더 어렸던 지난날의 나는, 그 어둠이 형체 없이 다가와 내 발목을 잡고 밑으로 끌어내릴 때면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아주 작은 점 같던 조그마한 어둠이 나도 모르게 어마무시한 형태로 커져서 나를 허우적거리게 만들었기에
땅굴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도 돌아보면 어느새 깊숙이 들어가 웅크린 내가 있었다.

이런 우울감을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좀 더 다른 방법으로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은데, 이럴 때면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의도를 오해하곤 해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더 싫어지고, 또 싫어지면 땅굴은 더 커지고.. 밑바닥도 없는지 한없이 한없이 새로운 구멍이 생겼고 나는 그 속으로 계속해서 빠지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멍하니 있기, 주황빛을 머금고 있는 은은하고 따뜻한 조명, 트로피컬 하우스 또는 조금 느긋한 기타 소리, 밝지 않은 방과 그림 그리는 시간,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

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그것들로 인해 마음이 위로되고 편안해지다가도 돌아서면 다시 누군가를 마주하는 일이 귀찮고 무섭게 느껴진다.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내가 머무르는 곳에 나 혼자라면.
이런 마주함도, 내가 누군가에게 삐딱하게 굴 일도 없을 텐데, 하고 무기력해진다.

그러한 무기력감은 땅굴에서 기어올라나가는 나를 미끄러뜨려 다시 웅크리기 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냥 나를 토닥여주기로 했다.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생각보다 나는 단단하다고.
내 안에 그 힘이 있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고 토닥여본다.

그래. 생각을 바꾸는 게 가장 쉽다.
다시 일어나 걸어보자
여전히 나는 잘하고 있어. 조금 느리게 걸을 뿐이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나는 그런 내가 좋아...
느린 나를 좋아해 주고 싶어...

흐릿한 눈으로 알지만 모른 척,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인척했지만
똑바로 바라보면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모든 모습이 나인데. 나는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 모습의 일부를 더욱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서 배척하고 있었더랬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이 존재하는데 사실 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외면했던 내 모습들.

아, 봄이고 싶다. 하면서 우울에 젖어들었지만
봄이고 싶을 땐 봄이 오길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이제는 내가 봄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스물여덟이 됐다.
나는 정말 쿨하지 못해서 땅굴에 빠질 때가 많았는데, 내 모습을 인정하고 그것에 연연하지 않으니
더 어렸던 나보다, 2년 전의 스물여섯보다, 땅굴을 파는 횟수가 전보다 훨씬 줄어들게 됐다.
다른 이는 다른 이고 나는 나이기에 그저 흘러가는 데로 두었더니 마음이 제법 가벼워졌다. 나에겐 ‘될 대로 돼라’가 약인가 보다.

여전히 타인의 감정을 신경 쓰고, 남보다 나에게 더 관대하지 못하고, 감정적인 내가 존재하지만 그게 나인걸 어떡해.
벗어나려 할 때는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옥죄더니 그냥 그 결대로 두고 인정해버리니 숨 막히지 않는다.

타인이 지긋지긋하고 누구와도 소통하고 싶지 않은 귀찮음 또는 환멸감은 때때로 찾아온다.
그로 인한 무기력함과 우울 또한 그렇다.
하지만 어느 정도 조금은 견딜 수 있는 희미한 힘 ‘어쩌라고’ 주문이 생긴 것 같다.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희미하지만, 틈새로 들어온 빛은 꽤나 단단했다.

 

그토록 바라던 단단한 나.

그 ‘단단한 나’는 정말이지 내가 너무나 혐오하던 내 모습으로 인해 생기고 있다.
진짜 웃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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